누가 뭐래도 모교와 부산중고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가까운 라이벌 명문들이다. 부산중고의 경우 일제 시대 초기인 1913년 관립부산중학교로 시작한 일본인 학교였다. 해방되자 한국인 중학교로 새출발하여?초기에는 모교와 함께 남일국민학교(현재 광일초등학교) 자리에서 같은 교사, 같은 선생님 밑에서 수학한 사실은 앞에서 얘기드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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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백낙준 문교부 장관 시절 전국에 각도별로 하나씩 여덟 개의 ?고등학교를 세우기로 한다. 부산에서도?이 학제에 의해 한 개의 고등학교를 만들게 된다. 일제 시대 일본에서 지역별로 한 개의 고등학교를 지어 우수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바 있다. 이 제도를 본딴 것인데 지역명을 따서 부산고등학교(부산고)라 이름짓게 된다. 대구 지역은 대구고, 광주 지역은 광주고라 짓게 된다. 따라서 이때 지어진 부산고는 당시 부산중(6년제)이나 지금의 부산고와는 개념이 좀 ?다르다. 이 부산고를 부산 어디에 짓느냐가 문제였는데 부산중학교 쪽으로 정해진다. ?당시 모교 경남중은 교사의 시설이 부족한 형편이었고 부산중은 다소 여유가 있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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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모교 경남중 7회 졸업생이 중3 시절 새로 만들어지는 부산고에 대거 지원하게 된다. 신입생 110명 모집에 53명이 응시하여 전원 합격하고 1등에서 10등까지 모두 경남중 출신이 차지하게 된다. 1950년 6월 22일 부산고는 첫 입학식을 갖는다. 현 부산고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이다. 그런데 이 학제는?6 25?전쟁 중 1년도 못되어 유명무실해지고 1951년 8월 교육법 개정으로 중고교가 분리되면서 전국의 6년제 중학교가 모두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 과정으로 바뀌게 된다. 모교 경남중(6년제)의 학교명도 부산서중(3년제)과 부산제일고(3년제)로 바뀌고, 부산중(6년제)의 경우 부산동중(3년제)과 부산고(3년제)로 바뀌게 된다. 부산고에 입학한 경중 출신들은 다시 모교로 돌아오고자 했으나 당시 부산고 초대 교장이신 김하득 선생의 적극적인 설득과 교육 행정의 졸속 처리로 모교로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고? 졸업생이 된다. 우수한 인재들을 영입한 부산고가 도약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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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방 후?모교 경남중고와 선의의 라이벌 부산중고는 이래저래?얽히고섥히면서 서로 경쟁하고 발전해 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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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로 지원해 갔다는 내용이 아주 새롭습니다. 물론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간에 막연히 잘못 알고 있기로는..경남고는 일본인 학교이고 부산고는 본토인 학교였다 였습니다.
누구든 뭔가 제대로 확인하여 알지 못하면..크나큰 오류를 지속 만들어 가게된다는 새삼스런 교훈이 됩니다.
만주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 였다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후 서울에서 그 정신을 이어받은 신흥대학
이름으로 재설립되었으나..이후의 재단 이사들은 이 사실을 모두 학교 연혁에서 지워 버리고..학교 이름도
경희로 바꾸었다는데-
지금도 그 설립자의 후손들이..애초 연혁에 그 지워진 사실을 넣어달라 부탁하고 있고..
그 사실 자체가 현싯점 누가 봐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고 자랑스런 것임에도..
그 작업을 꺼려하고 있다 함미다.
지금도 너무나 황송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기도 함미다만..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아베에게 적극 부탁하여
가능한 조속한 시일내 다시 한국을 합병해주기 앙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듬미다.
그리되면 지금과 같은 북한의 헛된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도 있어.. 마음에 안도의 크나큰
평안함이 도래하게 되리라 사료되는군요.^^
아주 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척이 잘 되지않고 있는 사실로 근거해 볼 때..
문통을 비롯하여 현 정권 자체가 전반적으로 친일인사로 구성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절망적 상상마저 되고 잇슴미다.^^
친일이라 해서 별반 문제될 일은 없지만..존재했던 사실 자체가 지속 은폐되고 있는 일은..
이후로 나라가 제대로 뻗어나가는데..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니..그것이 문제겟지요.^^
신흥무관학교는 1912년 6월에 설립되어 10여년간 운영 되어 1920년대 청산리대첩의 대승을 거둔 독립군 양성의 군사학교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역은 조선의 명문 집안인 백사 이항복의 10대 후손인 이철영, 이석영, 이건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6형제가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세웠습니다. 그 형제중 둘째인 이석영은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영의 양자로 들어가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았는데 그 재산을 정리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쌀 한가마 3원 이었는데 토지를 팔은 돈이 40만원 이었으니 현재 시세로 600억원 정도 되는 재산이었음.
이때 일제는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에 대규모 군대를 출병시켜 중국 마적과 결탁하여 독립군을 초토화 시키면서 만주의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 했던 것 입니다. 그 후 독립운동은 러시아의 연해주, 중국 본토로 이동하게 됩니다.
문통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했던 남자현여사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 , 간도참변을 취재하다 실종당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 영화 감독 나운규, 석주 이상룡의임청각 둥을 광복절 행사때 거명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현재 집권 세력은 친일파 라기 보다 김구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은 민족 자주파적인 성격이 강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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